이제 책 같은 건 없어도 살 듯한 세상이지만, 나는 책이 있어 산 것 같다. 글을 읽다 보면 좋은 글을 찾아 읽게 되고 그런 글을 쓴 큰 사람을, 시공과 무관하게 만나게 된다. 잠깐 차 한 잔을 나누어도 가까워지는데 누군가가 온 힘을 쏟아, 때로는 인생을 다 바쳐 쓴 책 한 권을 읽는다는 건 실로 엄청난 일이다.
같은 글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들은 또 얼마나 가까워지는지. 같은 시인(첼란)의 시를 읽었다는 그 하나의 이유로 처음 본 나를 간곡하게 초청하던 루마니아 학자, ‘파우스트’를 읽고 번역했다는 이유만으로 먼 극동에서 온 낯선 작은 여자에게 정중히 강연을 부탁하던 독일 괴테 학회장, 괴테의 ‘서·동 시집’에 대한 강연을 듣고 200년 전에 나온 그 귀한 초판본을 선뜻 건네주던 독일인 부부, 중국이 처음 개방되었을 때 자금성 계단에서 마주쳐 말없이 서로 미소만 지었던 독일 카프카 연구가(미소는 대략, 카프카는 여기 와보지도 않고 ‘황제의 전갈’을 썼는데, 우린 현장에 있구나 하는 뜻이었다)…. 함께 책을 읽는 즐거움을 나눈, 멀고 가까운 곳의 참 많은 얼굴이 끝없이 눈앞을 지나간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이야말로 내 삶의 천상적 지분인 것 같다.
책이 귀했었다. 산골에서 나서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부터 서울에서 혼자 살았는데 매달 집에서 하숙비 외에 용돈도 조금 왔다. 그러면 학교 앞 작은 서점에 들러, 그때 마침 나오고 있던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을 한 권씩 샀다. 달리는 돈을 쓸 줄 몰랐다. 한 권에 200원 남짓 했던, 나의 첫 재산이었던 그 책들의 풀빛 하드 커버의 촉감이 아직도 생생하다.
책은 세월이 가도 귀하기만 했다. 남의 나라 문학이 전공인데, 제때 유학도 못 가고 책 구하기가 참 어려웠다. 어렵사리 구한 그 귀한 책들을 집중해서 읽었고, 집중해서 읽는다는 건 나에게는 늘 번역을 해 가며 읽는다는 뜻이다. (타자기는 교정이 잘 안 돼 책 한 권을 읽으면, 즉 번역하면 글이 되게 고치느라 책 한 권을 다섯 번 정도는 타이핑을 해서) 자주 손가락 고장이 났다. 번역이 마무리되면 그것에 대한 글도 썼다. 모두 서랍으로 들어갔으나 나중에 어쩌다 기회가 있으면 옮긴 글은 책이 되고, 쓴 글은 모여 연구서가 되었다. 그게 어느덧, 아마도 쌓으면 내 키쯤은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누군가 내가 펴낸 책들의 후기를 모은 책 ‘맺음의 말’을 보고 독일 문학사를 읽은 것 같다고 했는데 나야말로 그랬다. 천천히, 번역까지 해 가며 읽은 책 한 권 한 권과 더불어, 매번 하나의 세계가 열려 오곤 했다. 유라시아 대륙을 끝에서 끝으로 내 두 발로 달려간 것도 같다. 나중에는 실제로 달려가기도 했다.
무슨 일로 어디로 달려가건, 좋은 도서관에도 앉았다. 뮌헨에도, 베를린에도, 바이마르에도, 케임브리지에도, 더블린과 시카고에도 G자 어름쯤의 서가(근년에 ‘Goethe’에 몰두한 탓이다) 가까운 창가에 내 자리가 있다. 세계는 내게 도서관의 내 자리의 망(網)이다. 세상 어딘가에, 곳곳에,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그리로 나를 찾아올 만큼, 때로는 우편물이 그리로 올 만큼, 내 자리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부유함인지. 도서관에서야 그냥 앉아만 있으면 내 자리가 되니 부유해지기 너무 쉬웠다. 달리 지상 어디에 그리 쉽게 한 자리가 생기겠는가. 세상사 서툰 사람이 세상에서 야무지게 해낸 일도 한 가지는 있는 것이다.
계산은 점점 더 안 되지만 그래서 오히려 해내는 일도 제법 있다. 할 일을 그냥 하니 되는 것이다. 이제는 책의 집을 직접 지어 혼자 지키느라 주경야독이 격심해졌다. 그래도 하루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늦은 밤, 작은 등불을 들고 캄캄한 뒤뜰을 걸어 작은 단칸방 집의 불을 켤 때면 행복하다.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인 것이다. 모든 시공을 넘어 누군가를 아주 가깝게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노동하고, 읽고, 쓰고…. 그게 마지막 날의 나의 모습이어도 유감이 없을 것 같다.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