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이 글공부로 ‘7년’이나 낭비한 이유는? [나침반 비문학]

▲[나침반 36.5도] ‘인문 다이제스트’에 실린 콘텐츠 이미지

공부, 수단인가 목적인가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앎을 원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 스의 저서인 『형이상학』의 첫머리에 박혀 있는 문장이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2천 년이 넘도록 그 생명력이 이어지고 있는 명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글에서 감각 기관을 통한 앎에서부터 경험을 통한 앎, 그리고 학문을 통한 앎에 이르기 까지 인간이 추구하는 앎의 몇 가지 위계를 설정한다. 

모든 생명체는 일차적으로 시각을 비롯한 여러 감각을 통한 앎을 추구한다. 그중의 일부는 여기에 더하여 경험을 통한 앎을 추구하고, 또 그중의 일부는 이 에 더하여 학문을 통한 앎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경험을 통한 앎과 학문을 통한 앎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앎의 차이를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지 여부에서 찾는다. 즉 경험으로 아는 사람은 어떤 사실 자체를 알기는 하지만 왜 그러한 사실이 나타났는지 모른다. 반면에 학문을 하는 사람들은 왜 이러한 사실이 나타 나는지 알고 있고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예컨대 경험을 통해 불이 뜨겁다는 사실 을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이 불이 뜨거운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지는 못한다. 그 ‘왜’를 설명하는 것은 학문하 는 사람, 곧 공부하는 사람의 몫이다. 

공부의 참뜻은 여기에 있다. 공부는 지식을 쌓는 행위이자, ‘왜’라는 질문을 얻고 스스로 이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공부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학문(學問)’이라는 단어에 ‘묻다[問]’라는 글자가 포함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허생이 글공부에 매달린 7년의 세월은 스스로 질문을 얻고 이에 대해 스스로 대답하 기를 반복한 시간이다. 그렇다면 허생이 글공부 기간으로 10년을 기약한 데 대해 마냥 비판으로만 일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허생의 선택이 정당하다는 데 대해 조금이라도 동의한다면, 이제 부인의 조롱에 삐딱한 시선을 보내 보기로 하자. 부인이 허생에게 보내는 조롱은 생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글공부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었다. 허생의 공부는 과거 시험에 대비한 공부도 아니고 생계를 잇는 데 도움이 되는 공부는 더더욱 아니다. 

부인은 공부가 돈을 벌거나 곡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돈이나 곡식은 먹고사는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마도 허생의 생각이었을 터. 

따라서 먹고사는 문제만 놓고 봤을 때 부인의 생각은 잘못이 없다고 하더라도, 글공부 자체를 삶의 도리로 여기는 선비의 입장에서는 정당하지 못한 생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부인의 생각은 오늘날의 학교 교육에서 문제 해결 능력을 강조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을 가르쳐야 한다는 논리와 궤를 같이한다. 즉 학교 교육을 직업을 중심으로 한 사회생활의 준비 단계로 보는 관점이다. 

선진국은 IT· 바이오·로봇 시대에 대비해 컴퓨터 프로그래밍 등 실용적인 교육에 열중하는데, 우리의 교육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학과 통폐합을 시도하려는 대학들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성장과 성숙, 자아 성찰, 진리 탐구와 같은 가치를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퇴행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허생의 부인이 오늘날의 학교를 본다면, 이러한 생각에 충실하게 동 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시 질문을 던진다. 공부는 왜 하는가? 공부를 해서 성적을 올려놓으면 진로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또 좋은 성적을 밑천삼아 이른바 명문 대학을 나오고 좋은 학력(學歷), 즉 이름 높은 학교를 다닌 경력이 있으면 좋은 직업을 가지고 좋은 곳에 취업하는 데 유리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공부의 진정한 목적은 좋은 직업을 구하는 데 있는가? 좋은 직업이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벌어들이는 직업이 더 좋은 직업인가? 

이런 질문들은 공부를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실용적 수단으로 보는 관점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물론 공부가 오직 그 자체로 순수한 목적이라고 보는 관점은 비장에 가깝도록 숭고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왜 필요하며,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들이 어떤 성격을 갖는지를 고려해 보면 이 질문들에 대해 회의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써먹기’ 위한, 혹은 문제 해결을 위한 실용적 지식을 겨냥하지 않는다. 만약 실용적인 지식에 우선적 가치를 두고 학교 교육을 추진해 왔다면, 우리는 학교에서 자동차 운전을 배우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 운전을 하면서 살아갈 현대인들에게 그만한 실용적 지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는 학교 운동장에 운전 연습장 같은 코스를 그려 놓고 자동차 운전을 가르치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운전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학교 교육에서 지향하는 공부의 참뜻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다움의 추구에 있다고 한다면, 다소 추상적으로 들릴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학교 교육은 근본적으로 인간이 어떠한 문제를 접했을 때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아니 그 이전에 어떠한 문제를 발견 하는 안목을 기르는 데 더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공부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문제가 공부를 한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학력(學力)이다. 중요한 것은 학력(學歷)이 아니다. 학교에서 운전 기술이 아니라 동력의 전달 원리를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배움은 끝이 없다.  

곤충이나 다른 동물들은 감각이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얻고 요령을 익힌다. 인간은 이들과 어떤 점에서 다를까? 왜 인간은 일회적이고 개별적인 경험을 넘어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원리를 알기 위해 애쓰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바로 공부의 궁극적 가치가 담겨 있다. 

일상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전혀 쓸모없는 문학을 배우고 함수와 미적분을 배우면서 써먹을 곳이 없다고 투덜댄다면, 그것은 공부의 본질을 무시한 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족한 상태에서 더 나은 상태로 발전해 가는 것이 공부라면, 그 나은 상태란 결국 문제를 더 잘 보고 더 잘 해결하는 능력을 가진 상태라 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하는 공부란 어떤 면에서 그 공부를 지속할 수 있는 지적 근육을 축 적하는 여정 그 자체이자 또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지적 촉수를 다듬는 일이라 할 것이다. 

장자(莊子)라는 현인이 말했다. 끝이 있는 존재가 끝없는 것을 좇는 일은 위험하다고. 그러고는 여기에 덧붙였다. “그 사실을 알면 서도 지식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정말로 위 험한 일이다.”(『장자』 내편 3장 「양생주(養生主)」) 

물론 장자가 말한 ‘끝이 있는 존재’란 바로 우리 인간이다. 사실 우리가 누리는 삶에는 분명한 끝이 있다. 그러나 지식의 세계는 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지식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할 공부 또한 끝이 있을 리 없다. 공부에 끝이 있다면 그것은 곧 삶의 끝을 뜻한다. 

그러니 장자의 말은 곧 우리가 그 위험한 일을 하고 있는 데 대한 경고로 읽힌다. 자신과 같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면 지식을 찾아가는 위험한 일은 애초에 엄두를 내지 말라는 오만도 얼핏 보인다. 

그러나 장자 특유의 유머 코드를 염두에 둔다면, 그래도 인간이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함축을 담고 있는 말로 새겨 마땅하리라.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앎을 원한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에 위트를 가 미하여 번역하면 꼭 이와 같은 장자의 말로 구성될 것만 같다. 

몰락한 양반 허생은 이러한 생각을 품고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 글 공부에 매진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했던 조선 사회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대책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당대의 조선 사회가 그의 문제의식과 문제 해결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뿐이다. 

그가 커다란 성과를 이루어 냈으면서도 결국 사회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를 택하고 종적을 감추어 버린 이유도 이런 세상에 대한 냉소가 아니었을까? 허생은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간 불우(不遇)한 선각자였고, 불운(不運)한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자료 제공=해냄출판사 

error: 기억 잘하는 10가지 훈련😃기억력스포츠를 시작하세요
0
    0
    장바구니
    장바구니가 비었습니다쇼핑 계속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