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보다 노력이 중요하지 않나요?
연재ㅣ강원국의 ‘공부하면 뭐 하니’
학교 다닐 적 친구들 앞에선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남몰래 했습니다. 왜 그랬냐고요? 가장 큰 이유는, 공부하지 않고도 시험 잘 보는 친구로 보이고 싶어서였습니다.
‘저렇게 열심히 해서 공부 못할 사람이 있겠느냐’는 소리를 듣기 싫었습니다. 머리가 좋은 아이, 재능을 타고난 아이가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엄마들도 자주 이렇게 말하잖아요. “우리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 해서 성적이 안 나온다”고요.
친구들을 방심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없진 않았습니다. ‘어제 텔레비전 보느라 공부 하나도 못했어’ 하면 친구들이 마음을 놓을 테고, 그 해이해진 틈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죠. 조금 심했나요? 그렇다면 이렇게 변명해보죠. 질투받기 싫었다고요. 자기 자식이 열심히 노력하면 기특하고 예쁘기 그지없지만 남의 자식이 그리하면 왠지 ‘독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던가요?
고등학교 1, 2학년 때 네 명의 친한 벗이 있었습니다. 시험기간이 되면 한 친구 집에 모여 공부했습니다. 그 친구 집은 6·25전쟁 때 인민군 대장이 숙소로 쓸 정도로 멋졌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할머니와 한방을 썼기 때문에 시험기간 일주일가량은 우리 친구 넷에 할머니까지 다섯이 동거했습니다.
늦은 밤 친구들이 다 자고 나 혼자 공부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나무라셨습니다. ‘우리 손주 자는데 왜 불을 켜놓느냐’고요. 친구 깨워서 함께 공부해야지, 왜 너만 하느냐는 말씀이셨죠.
직장에도 두 부류 사람이 있습니다. 이른바 근면, 성실로 승부하는 사람과 아이디어, 창의력으로 승부하는 부류가 있지요. 전자는 야근을 많이 합니다. 엉덩이를 자리에 오래 붙이고 앉아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성심을 보여줍니다. 또한 그것이 자신의 은신처이기도 합니다. 결과가 좋지 않아도 열심히 노력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의 노고를 방패로 쓰기도 합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습니다. 그 이상 어떻게 합니까.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항변하고 싶고 또한 그리 인정해주길 기대합니다. 하지만 반응은 기대와 다릅니다. 심지어 우습게 보기도 합니다.
게으른 베짱이보다는 부지런한 개미가 더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고난 사람보다 노력하는 사람이 더 대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재능이 신분이 되고 기득권이 자격이 되는 것에 반대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그에 반해 노는 것 같은데 결과는 좋은 직원은 왠지 멋져 보입니다. 얄밉지만 그렇습니다. 시기하기보다는 친해지고 싶은 대상이 됩니다. 나는 천재를 꿈꾸는 노력파였습니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호숫가를 유영하고 싶었지만, 늘 발을 동동 구르며 발버둥치는 오리로 살았습니다.
직장인뿐만이 아닙니다. 기업인 세계도 마찬가집니다. 기업에서 세 분 회장의 비서실에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기업인도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물려받은 기업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수성가한 기업인입니다. 내가 느낀 바로는 물려받은 기업인이 자수성가한 기업인을 무시합니다. ‘언제부터 자기가 잘살았다고’, ‘돈벼락을 맞아서 말이야’ 하며 업신여기고 자기들 세계에 끼워주지 않습니다. 그들만의 리그가 분명 있습니다. 피눈물 나는 노력을 인정해주지 않지요. 물려받은 주제에 말이죠.
자수성가한 기업인도 두 부류로 나뉩니다. 맨주먹으로 시작해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천신만고 끝에 기업을 이룬 사람과, 세상을 읽는 통찰력과 아이디어로 단박에 성공신화를 만든 사람. 이 역시 후자가 더 세간의 주목을 받습니다. 이제는 천신만고형이 나올 확률도, 또 나온다 하더라도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지만요. 영혼까지 갈아 넣는다 해도 말이죠.
정치권도 마찬가집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혹은 특정 지역에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또는 젊었을 때 고시 한번 합격한 이력으로, 그것이 신분이 되어 평생 떵떵거리며 정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아등바등 그 자리까지 올라온 사람을 우습게 압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거나 ‘소년급제’한 이들은 애쓰면서 올라온 사람들에게 ‘이기적’이라거나 ‘악착같다’는 낙인을 찍기도 합니다. 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을 씌우기도 하고,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도록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기도 하지요.
오죽하면 젊은이들 사이에서 ‘노력충’이란 말이 나오겠습니까. 이 말은 노력을 강조하는 기성세대를 비꼬는 신조어이지만, ‘노오력’만으로는 삶의 조건을 개선할 수 없다는 자조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그들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노력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직장을 떠나 책 쓰고 살면서 또다시 느낍니다. 세상에는 처음부터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가 있더라고요. 기업 회장실이나 청와대에서 함께 글을 썼던 사람 가운데는 특히 그런 ‘넘사벽’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부족한 재능을 시간으로 때웠습니다. 남들이 한 시간이면 쓸 수 있는 걸 두세 시간 썼지요. 쓰는 것은 재능이 필요하지만, 고치는 건 노력으로 가능하거든요. 헤밍웨이도 그랬다고 하지요. “나의 초고는 끔찍한 수준이다. 나는 늘 글쓰기가 어려웠고 때로는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수십, 수백 번 고쳤다.”
게으른 베짱이보다는 부지런한 개미가 더 행복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고난 사람보다 노력하는 사람이 더 대접받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재능이 신분이 되고 기득권이 자격이 되는 것에 반대합니다. ‘대학도 안 나온 놈이 어딜 감히?’ ‘어디 근본도 없는 녀석이 넘볼 걸 넘봐야지.’
노력이 폄훼당하고 조롱당하는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 진보와 진화는 노력에서 비롯됩니다. 노력하지 않았는데 좋은 결과를 내는 사람보다는, 노력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은 사람을 응원하고, 그들에게 재도전과 역전의 기회를 주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뱁새가 황새 쫓다가 가랑이 찢어진다”는 참 불순한 말입니다. 한계를 인정하고 분수에 맞게 살라고요? 송충이는 솔잎만 먹고 살아야 한다고요?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요? 황새로 태어나지 못한 게 내 잘못인가요? 다리 짧은 뱁새는 평생 황새를 부러워만 하며 살아야 하나요? 싫습니다. 종종걸음이라도 쫓아가 볼래요. 가랑이 찢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죠.
강원국 ㅣ <대통령의 글쓰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