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없는 히드라가 사람과 유사한 수면 행동을 보이는 것이 세계 최초로 발견됐다. 수면 행동은 뇌를 비롯한 중추신경계를 갖는 동물의 전유물로 여겨졌었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생명과학과 임정훈 교수팀은 “뇌가 없는 원시 동물인 히드라가 고등 동물인 사람과 유사한 수면 행동을 하는 것을 밝혀냈다”고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7일(현지 시각) 밝혔다. 연구는 일본 규슈대학교 타이치 이토 교수팀과 공동으로 수행됐다.
◇히드라, 불 꺼진 밤에 ‘수면’
중요한 생리현상 가운데 하나인 수면의 기원과 그 진화과정에 대해서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수면 행동은 뇌의 휴식을 위한 고등동물의 생체활동으로 여겨져 왔다. 뇌(중추신경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원시적 형태의 자포동물은 하등한 동물로 여겨지는 데, 히드라, 산호, 말미잘, 해파리와 같은 동물이 포함된다.
연구진은 적외선 카메라를 이용해 히드라의 움직임을 24시간 연속 촬영했다. 히드라는 불이 꺼진 밤 동안 둔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것이 사람의 수면에 해당한다고 연구진은 설명했다. 연구진은 히드라가 사람처럼 밤낮을 구분해 잠을 자며, 물리적 자극이나 주변 온도를 높여 수면을 방해하면 역시 사람처럼 수면을 보충하는 행동을 발견했다.
◇수면 촉진 물질, 히드라와 사람간 차이
연구진은 히드라의 수면을 촉진하는 물질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이 사람에게서는 수면을 억제하는 반면 히드라의 수면은 촉진했다. 이는 도파민의 역할이 생물 진화 과정에서 정반대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람의 수면을 촉진하는 ‘멜라토닌’이나 ‘가바’의 경우에는 히드라에게서도 같은 수면 촉진 효과를 보였다. 임정훈 교수는 “대표적 신경전달 물질인 도파민은 인간과 초파리에게서는 수면을 억제하는 것으로 잘 알려졌으나, 히드라에게서는 오히려 수면을 촉진하는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새롭게 밝혀냈다”라고 설명했다.
연구진은 히드라의 수면 현상을 중추신경계를 갖는 초파리, 인간 등과 비교했다. 이번 연구는 원시 생명체로부터 자포동물(히드라)과 절지동물(초파리), 척추동물(사람) 등으로 중추신경계가 점차 발달함에 따라 수면의 조절원리가 어떻게 진화했는지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히드라 잠자면서 체세포 성장
연구진은 히드라가 수면을 통해 체세포 성장을 촉진한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히드라의 수면을 방해하면 체세포 증식이 억제된다. 뇌가 있는 고등 동물은 수면 활동을 통해 뇌의 노폐물을 제거하고 기억력에 중요한 신경세포들의 연결고리를 조정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임정훈 교수는 “이번 연구는 진화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동물들이 언제부터 잠을 자기 시작했는지, 중추신경계 진화에 따라 수면의 조절원리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등을 추적해 수면의 기원을 찾는 연구에 중요한 발판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출처 : 조선일보 유지한 기자 입력 2020.10.08 03:00